서울대 공대 두고 ‘의대’ 픽···어쩌다 ‘의대 공화국’이 됐나


1985학년도 이후 전국 자연계 최고 상위 20위 이내 학과. 종로학원 제공

1985학년도, 그 시절엔 서울대 물리학과가 의대보다 합격선이 높았습니다. 위 표는 종로학원으로부터 제공받은 과거 자연계 합격선 상위 20개 학과의 목록인데요, 상위권 대다수를 서울대가 차지한 것이 눈에 띕니다. 연세대 의예과조차도 서울대 이공계 학과들보다 한참 아래에 있지요. 전국 각지 의대들이 나열된 최근 배치표와는 많이 다릅니다.

인재들이 의대로 몰리고 있습니다. 한때는 연세대 의대를 붙어도 서울대 물리학과를 갔는데, 지금은 그런 수험생이 아마 거의 없을 겁니다. 의대 진학을 도전하기 위해 재수, 삼수는 물론 학교를 자퇴하는 수험생도 늘고 있습니다. 교육계에서는 이공계열 교육 기반이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를 냅니다. 입시학원에는 직장인들의 의대 진학 상담도 심심찮게 들어옵니다. 우리 사회는 언제부터, 무슨 이유로 ‘의대’로 수렴하게 됐을까요.

‘의대쏠림’, 이 정도입니다

2022~2024학년도 자연계열 상위 20위 이내 학과. 종로학원 제공

2022~2024학년도 자연계열 상위 20위 이내 학과. 종로학원 제공

현 시점 자연계 상위 20위 이내 학과의 목록을 위 표와 비교해 보면 차이가 확연합니다. 서울대 학생들도 짐을 싸고 의대로 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종로학원에 따르면 지난해 수시 모집에서 서울대에 최초 합격한 수험생 2181명 중 228명(10.5%)이 등록을 하지 않았습니다. 미등록자의 87%(200명)는 자연계열 학생이었습니다. 최상위권 학생들이 서울대 자연계열 학과에 붙고도 의대를 택한 결과로 풀이됩니다.

의대쏠림은 소위 ‘SKY’ 대학에서 휴학생, 자퇴생 등 중도 탈락자를 다수 생산했습니다. 2022학년도 서울대·연세대·고려대 중도 탈락자는 2131명으로 전년(1971명)보다 160명(8.1%) 늘었습니다. 이들 대학의 중도 탈락자는 2018학년도 1339명에서 2019학년도 1415명, 2020학년도 1624명 등 꾸준히 증가하다 2022학년도 처음으로 2000명대를 기록했습니다. 학교에 적을 둔 채 의대에 재도전하기 위해 반수하거나 아예 자퇴하는 학생들이 늘어난 결과라는 분석이 많습니다.

취업이 보장된 계약학과도 의대열풍에 밀려 힘을 쓰지 못합니다. 2023학년도 정시모집에서 고려대, 서강대, 연세대, 한양대 반도체 계약학과에 합격한 후 등록을 포기한 응시생은 모집인원의 1.5배를 넘었습니다. 당시 삼성전자와 연계된 연세대 시스템반도체공학과는 합격자 전원이 등록을 하지 않았습니다.

N수생 비중도 갈수록 높아지고 있습니다. 지난해 대학수학능력시험 지원자 중 졸업생 등 N수생 비율은 35.3%로 28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습니다. N수생 비율은 2008학년도 이후 20%대 초중반을 유지하다가 2020학년도 28.2%, 2021학년도 29.7%, 2022학년도 29.2%로 나타났습니다. 2023학년도에는 처음으로 30%대(31.1%)에 진입했습니다.

‘전화기’ 시절, 그리고 ‘컴공’ 붐도 있었는데

46대1의 높은 경쟁율을 보인 1973년 서울공대 기계설계학과 시험. 경향신문 DB

46대1의 높은 경쟁율을 보인 1973년 서울공대 기계설계학과 시험. 경향신문 DB

과거에는 대학 간판, 그리고 취업에 유리한 학과들의 선호도가 높았습니다. 1970~1980년대에는 공업, 제조업 등이 발달하면서 일명 ‘전화기(전자공학·화학공학·기계공학)’로 불리는 학과들이 인기였습니다. ‘전화기’만 가면 취업이 보장된다는 인식이 강했습니다. 1973년에 신설된 서울대 기계설계학과 입학시험은 당시까지 최고 경쟁률을 기록했다는 보도도 있습니다.

당시 수능 배치표 상위권은 서울대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서울대의 전자공학과, 기계공학과를 비롯한 자연계열 상당수 학과가 상위권을 차지했습니다. 과학인재를 육성하기 위한 정부의 정책 방향에 따라 물리학과는 전국 수재들의 집합소가 됐었죠.

1990년대에는 IT 기술이 발전하면서 컴퓨터공학과가 부상했습니다. 당시 배치표에서는 서울대 컴퓨터공학과가 2위로 우뚝 올라 섰습니다. ‘제2의 빌게이츠’를 꿈꾸는 학생들이 많았던 시절입니다.

외환위기 이후 떠오른 ‘평생직장’ 무용론

2003년 12월4일 성균관대에서 열린 대학지원 전략 설명회에서 수험생들이 지원 배치표를 보고 있다. 경향신문 DB

2003년 12월4일 성균관대에서 열린 대학지원 전략 설명회에서 수험생들이 지원 배치표를 보고 있다. 경향신문 DB

의대는 1990년대 후반 외환위기를 계기로 급부상했습니다. 대기업에 다니던 ‘월급쟁이’들이 직장을 잃으면서 평생직장 개념이 사라지고, 소위 자격증을 가진 전문직의 필요성이 강조되기 시작했습니다. ‘평생직업’이 필요해진 것이죠. 이쯤부터 지방대 의대가 서울대 공대와 자연대를 앞지르기 시작했습니다.

설동훈 전북대 사회학과 교수는 “외환위기가 터졌을 때 샐러리맨(봉급생활자)들이 대거 해고됐는데 의사들은 전혀 그런 일이 없었다”며 “소득보다 명예, 브랜드를 따졌던 게 허상이라는 것을 깨달은 게 외환위기 때였다”라고 말했습니다.

소득이 장기간 보장될 뿐만 아니라 매우 높은 수준이라는 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국세청에 따르면 의료업 종사자(의사·한의사·치과의사)의 연평균 소득은 2021년 기준 2억 6900만원으로 2014년 1억 7300만원에서 7년 사이 9600만원(55.5%) 증가했습니다. 의사 1명의 연 소득이 매년 1370만원씩 오른 셈입니다. 이들의 연평균 소득은 국내 근로자 평균임금의 7배 수준이었습니다.

설 교수는 “자본주의가 심화하면서 어떤 대학을 나오더라도 의사의 기대소득이 높고, 사회적인 존중도 높다는 인식이 자리잡은 상태”라고 말했습니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도 “경제적인 수익이나 소득이 (학과나 진로) 선택에 영향을 주는데, 공대 졸업생들의 연구직 보수가 보장되지 않는 등 사회적 분위기가 복합적으로 형성된 결과”라고 말했습니다.

10년 간 의사 1만명 확충···날개 단 의대

지난 6일 서울 시내 의과대학 앞. 성동훈 기자

지난 6일 서울 시내 의과대학 앞. 성동훈 기자

최근 의대 증원 규모까지 확정되면서 의대열풍은 더욱 거세질 것으로 보입니다. 정부는 2025학년도 대입에서 의대 정원을 현원(3058명)보다 2000명 늘리고, 2035년까지 의사 인력을 1만명 확충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이와 함께 의대 재도전 움직임도 같이 거세질 것으로 보입니다. 종로학원은 서울대·연세대·고려대 합격생의 45%가량이 의대 진학 가능권에 있었는데, 2000명이 증원되면 정시 합격선이 하락하면서 78.5%로 증가한다고 분석했습니다. 상위권 대학 학생들이 의대 진학 장벽이 낮아졌다고 생각해 반수 등에 도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만기 유웨이 교육평가연구소장은 “이번 조치로 특히 최상위권 대학들의 계약학과들, 카이스트 등 과학기술원들도 영향을 받을 것”이라며 “학업을 중단하고 수능을 준비하는 중도 이탈자가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는 이야기”라고 했습니다. 이어 “올해 반수를 위해 주요 최상위권 대학들의 중도 탈락률도 급격히 증가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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